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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원생이 가슴으로 낳은 자식 학습도 인성 교육도 최선 다했죠"
예스대디 27.100.224.41
2017-06-16 09:29:08
 
3대가 ‘대물림’하며 광주에서 아동복지시설을 60여 년째 운영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시설 2대 원장은 미국 유학을 포기한 채 44년간 원생들에게 사람중심 ‘인성교육’과 학습교육을 펼쳐 퇴원한 원생들이 남아 있는 후배들의 후원자가 되는 등 선순환 구조까지 형성하게 했다.

광주 광산구 임곡면에 위치한 용진 육아원(용진원) 민명철 원장(69)이 그 주인공.

현재 이곳은 5살 유아부터 대학교 1학년 학생까지 48명이 함께하고 있다.

1974년부터 올해까지 44년째 원장을 맡고 있는 그가 용진원을 맡게 된 것은 아버지 민남식씨의 간곡한 권유에서 비롯됐다.

서울에서 중앙대학교 사회개발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에 신학 공부를 하러 가기로 했던 그는 유학 준비를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

당시 원장을 맡고 있던 아버지는 그에게 “복지시설을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결국 그는 경영에 할 수 없이 뛰어들게 됐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잠깐 행정 일을 돕다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사명감이 생겼다.

당시 120~130명에 이르는 원생들의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됐고 교통편이 좋지 않은 임곡에서 광주로 이들을 데려다줘야 하는 일 등 해야 될 일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애들이 동생 같고 조카 같아 사명감이 생겼고 아버지의 말 없는 희생과 봉사를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기 때문에 가업으로서도 잘 해내야겠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학습’과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둔 확고한 교육철학으로 아이들을 길렀다.

퇴원 후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남들만큼 배워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시설 안에 도서관을 꾸며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다. 보조금 지원 등을 받기 위해 필요한 사회복지시설 평가를 위한 형식적인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편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공부하는데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줬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1980년부터는 외원기관 (외국 국제아동기관)에서 후원받는 결연금 일부를 ‘대학 장학금’ 명목으로 저축해 대학 진학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 같은 교육에 대한 그의 의지는 아이들에게 꿈과 열정을 심어줬다.

원생들중 일부는 중·고등학교에서 반 1~2등을 놓치지 않고 전남대·조선대에 입학하거나 대학교 유아교육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반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또 인성교육도 철저하게 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시설 아이’라는 편견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더욱 ‘인성·예의’를 강조했으며 ‘후원자를 통해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것처럼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마인드도 심어줬다.

2011년 일본 쓰나미 피해 주민돕기 성금, 2013년 필리핀 태풍 피해주민 돕기 성금, 2015년 네팔 등 지진 피해주민 돕기 성금을 아이들, 직원들과 함께 모아 보냈다.

이 같은 바른 인성교육은 원생들이 퇴소한 후에도 동생들을 위해 후원하고 남을 돕는 사회구성원으로 자라게 했다. 현재 100 여명의 후원자 중 30 여명은 용진원 출신들이다. 이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스스로 매달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 철학도 남달랐다.

원장 사무실에는 44년간의 노고가 무색할 정도로 감사패 한 장이 없다.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복지시설을 운영하면 여기저기서 감사패를 주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단칼에 거절했다.

이는 혹시나 상과 관련해 용지원을 운영하는 데 불편함이 생기거나, 불상사가 발생해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그는 “용진원을 운영하면서 아버지가 꾸리신 복지사업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이 지내는 이 시설을 지키기 위해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전국의 많은 복지시설들이 운영비 부정 사용, 아동 학대 등으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때 용진원은 설립 이래 65년 동안 한 번도 비리에 연루된 일이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용기를 북 돋아 주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 미혼모 아이, 연고자가 없는 아이들이 오는 곳으로 알려진 용진원이다 보니 사회에서 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그는 “관내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싸움을 했다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용진원의 아이들이 개입됐을 거라 생각에 연락이 오는데 이런 편견에 부딪혀 싸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말했다.

지인의 소개로 송정청년회의소(JCI)와 법무부 선도위원회에 가입했고 사회사업가회 등 사회활동을 넓히면서 용진원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온 힘을 썼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못 입고 못 먹는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 생각, 옷 한 벌, 신발 하나를 사더라도 백화점에서 샀다.

또 1980년 원사를 신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당시 마침 복지부에서 전국 아동복지 시설기능보강사업이 계획되고 있던 때라 여러 기관의 협조를 얻어 용진원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기능보강사업을 하게 됐다. 7000만원 보조로 150평의 건물을 신축하게 됐다.

임곡면에서 가장 높은 3층 시설로 꽤 현대적으로 신축되니 원생들이 새집을 자랑하고 싶어 학교 친구들을 원으로 자주 데리고 오는 일까지 생겼다.

그는 이 참에 아이들에게 자긍심도 더 키워주고 복지시설과 사회의 벽을 허무는 일을 추진해야 겠다는 생각에 1984년 10월 ‘제1회 용진원장배 사생대회’를 개최했다.

임곡초교 100 여명의 아이들과 부모를 초청해 체육대회도 하고 푸짐한 시상도 했다. 그러면서 용진원에 대한 학부모들의 인식도 전환되고 아이들도 자신이 ‘용진원 아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용진원을 설립한 아버지의 ‘아이들 사랑’을 잊지 않고 있다.

교회 장로를 맡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1952년 서울서 기차 타고 임곡에 위치한 집에 내려오다가 임곡역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고아 서너 명을 보게 됐고 이들을 데려다가 집에서 거뒀다. 이후에도 고아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데려오게 됐다.

처음에는 사비를 들여 아이들 10여 명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다 정부에서 허가해 주는 ‘보육원’에 대해 알게 됐고 자기 소유의 밭과 과수원을 법인 사회복지원 설립 기본예산으로 모두 기부하면서 그해 8월 22일 사회법인 용진원을 설립했다.

육아원 명칭도 현재 아버지의 고향 임곡면 용진산 아래에서 시작했다고 ‘용진육아원’ 이 됐다.

다음 달 민 원장의 자리는 그의 아들 민재웅씨(37)가 맡는다. 대학교·대학원에서 지질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로 한 것이다. 아들인 민씨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용진원 원생들과 함께 자라 원생들이 민씨를 형, 오빠라고 부르며 한 가족으로 지내고 있다.

민 원장은 지난 44년을 생각하면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도 있고 지친 적도 있지만 18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값진 특권이었다고 말한다.

"‘요즘도 내가 44년간 키운 1850명 아이들의 진정한 아빠였나’,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퇴원하고도 동생들을 위해 꾸준히 애정을 보내주는 용진 회원들, 믿고 자녀를 맡겨준 연고자들, 아낌없이 후원해준 후원자 모두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박사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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